May 7, 2022

중동은 왜 싸우는가

유럽과 이슬람의 국가관-종교관

공통의 종교의식을 통해 무슬림들은 일체감과 연대의식을 만들어나갔다. ... 종교공동체 움마가 먼저 존재했고 이후 종교가 주변 지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이슬람 국가가 탄생했다. ... 움마가 확대되어 만들어진 이슬람 국가의 주권은 신에게 있었다. ... 이슬람 국가에서는 근대 유럽에서 등장한 '인민 주권'의 개념이 들어서기 어려웠다.^1
기독교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로마 제국이 존재했으며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써 종교가 국가의 통제 아래에 들어왔다. 유럽의 국가와 종교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다가 국가에 의해 종교가 포섭된 셈이다. ... 종교법이 로마법이나 게르만법을 대체하거나 우위에 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황제의 권한 아래에 있던 기독교는 로마 교회가 비잔틴의 통제로부터 독립해나간 후 국가와 종교가 서로를 지배하기 위해 기나긴 투쟁을 벌여나갔다. 그 과정에서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발생했다.^2

이란은 왜 시아파 국가가 되었는가

1501년 이란 북서부를 점령한 이스마일은 스스로를 '샤'라고 칭했다. 사파비 왕조가 페르시아 제국을 계승함을 천명한 것이다. 이스마일 1세는 시아파의 한 갈래인 12이맘파를 정식 종교로 포고하고 주민들을 개종시켰다. 하지만 당시 이란 지역은 수니파를 따르는 무슬림의 숫자가 더 많았다. 주민들의 반발은 거셌지만 이스마일 1세는 반란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그의 강제 개종 정책에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 숨어 있었다.
이스마일 1세가 시아파 강제 개종을 선포할 당시 이슬람 제국의 중심은 수니파인 오스만 제국이었다. ... 권력과 위엄, 그리고 영향력 면에서 신생국가 사파비 왕조의 이스마일 샤는 오스만 술탄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 그 고민의 해답이 바로 시아파로의 개종이었다. 그는 수니파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과 구별된 다른 정체성을 가진다면 술탄과 대등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1

나폴레옹의 충격, 이슬람을 깨우다.

1798년 7월 3일, 나폴레옹이 이집트의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했다. 카이로의 무슬림 군대는 최신 무기를 앞세운 프랑스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다. 이슬람의 우월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이 물러간 이후 이집트에서 권력을 차지한 ... 무함마드 알리는 프랑스를 통해 접한 유럽의 사상과 기술을 이집트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그는 프랑스에 사절단을 파견해 빠르게 변하는 유럽을 배워오도록 했다. 이후 유럽을 모방해 산업화를 추진했고 신식 기술을 도입해 무기를 혁신했다. ... 이집트는 빠른 속도로 개조됐고 강해졌다.^1

탄지마트,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 정책

1839년 술탄 압둘메지드 1세는 '귈하네 칙령'을 발표한다. 칙령의 핵심은 강한 군대, 세금의 효율적 징수, 효율적인 관료시스템 등 오스만 제국을 근대화하는 것이었다. 1876년 헌법이 제정되기 까지의 기간은 터키어로 '탄지마트(재편성)'라고 부른다.

민족주의의 발흥

유럽이 오랫동안 치열한 종교전쟁을 벌이는 동안 중동은 오스만 제국 아래에서 여러 민족과 종교가 공존해왔다. 절대왕정기를 거치면서 강한 군주와 단일 정체성을 만들어낸 유럽과 정반대였다. '귈하네 칙령'에 담긴 "무슬림과 비무슬림 모두 동일한 권리를 갖는다"는 선언은 기득권 세력인 무슬림들의 반발과 민족주의의 발흥을 막지 못했다.
1840-50년대에는 오스만 제국 각 지역에서 민족 및 종교 간 충돌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특히 발칸 반도에서 많은 정교회 희생자가 발생하자 러시아가 군사 행동을 개시하며 크림전쟁이 발발했다.

차관에 발목 잡힌 개혁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 갈등을 해결하고자 오스만 정부는 개혁 추진 방향을 제도에서 경제와 복지로 바꿨다. "유럽식 산업화로 추진하면서 ... 전국적으로 철도를 깔고 전기시설을 확충했으며 과학기술 발전에도 공을 들였다."^1
오스만 정부는 늘어난 관료조직과 군비 지출 그리고 대규모 건설사업을 추진하며 엄청난 재정 압박을 받는 처지에 놓였다. 크림전쟁 시기부터 차관을 들여오기 시작했지만 높은 수수료와 선이자에 실제로 경제성장을 위해 사용된 돈은 전체 차관 금액의 20%^2에도 못 미쳤다. 대부분의 차관은 앞서 빌린 외채의 이자를 갚는 데 주로 사용됐다. 결국 1876년 오스만 정부는 파산을 선언한다.

유럽의 병자, 아립인과 튀르크인

북아프리카는 유럽 강대국들의 차지가 되었고 발칸 반도와 이집트는 독립해서 떨어져 나갔다. 오스만 제국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유럽의 병자'라고 불릴 정도로 더이상 '제국'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오랜 기간 튀르크인들의 지배를 받은 아랍인들은 새로운 해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슬람권을 대표할 아랍인의 국가와, 서구에 의해 오염된 이슬람을 바로 세워야했다.

아라비아에서 불어오는 근본주의 열풍

14세기의 이슬람 신학자 이븐 타이미야는 이슬람 제국이 몽골에게 짓밟힌 것은 당시의 이슬람이 올바른 길에서 많이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적들과 대항해 지하드를 벌여야 한다"
1744년 무하이브 이븐 압둘 와하브는 타이미야의 주장을 자신의 시대로 끌어왔다. "초기 이슬람을 돌아가자! 오직 <꾸란>과 <하디스>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을 바꾸자!". 와하브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단으로 몰려 남쪽의 디리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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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4년 디리야의 부족장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와 와하브 간의 만남은 사우디아라비아 건국의 시발점이 되었다.

첫 번째 사우디 왕국: 다리야 에미레이트

3대 군주인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는 1805년 히자즈 지역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 무슬림의 성지인 메디나와 메카를 타락한 튀르크인으로부터 되찾겠다는 의지였다. "여기에는 희미하게나마 아랍인으로서의 민족주의적 기운이 깃들여 있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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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하비즘과 왕정

유럽 제국주의의 영향력 아래에서 대부분의 이슬람 지역은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오스만 제국을 비판했다. "탄지마트를 통해 이교도인 유럽 국가들의 문물을 들여왔고 알라가 계시한 샤리아를 버린 채 이교도들을 따라 헌법을 채택했기 때문이다"^1.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대표한다. 메카와 메디나를 영토 내에 확보하고 있음은 물론 건국의 근본에 와하비즘이 있기 때문이다.

하심 가문, 영국과 거래하다

오스만 제국의 패망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가장 큰 위협은 러시아였다. 1912-3년에 벌어진 발칸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를 비롯한 유럽 영토 대부분을 잃었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영국과 손을 잡으려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러시아와 삼국협상을 체결했다. 오스만 정부는 대신 독일과 손을 잡고 제 1차 대전을 치뤘고, 1918년 10월 31일 이스탄불에서 항복했다. 연합군은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후세인-맥마흔 서한

제 1차 대전 당시 영국은 아랍인들로 하여금 오스만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드록 선동했다. 그 운동의 구심점으로 영국은 '메카의 샤리프' 하심 가문의 후세인 이븐 알리를 낙점했다. 후세인 이븐 알리는 메카의 에미르(지역 수령)이자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족이기 때문에 아랍 사회에서 특별한 존경을 받아왔다. 1915년 7월 14일, 샤리프 후세인은 영국 외교관 헨리 맥마흔에게 편지를 썼다. "아랍어 사용 지역에 자신이 통치할 독립왕국을 세우는 것을 영국 정부가 동의해줄 것과 이를 오스만 제국과는 별도로 아랍 칼리파 국가로 인정해달라"^1. 아랍의 반란과 왕위를 맞바꾸려는 거래였다.
샤리프 후세인과 맥마흔이 주고받은 편지들은 결론 없이 애매하게 매듭이 지어졌지만, 후세인은 아라비아 반도와 대시리아 지역에 아랍왕국이 세워지리라는 것에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국의 계획은 달랐다. 영국은 프랑스와 '사이피스-피코 협약'을 맺어 오스만의 제국령인 아라비아 반도의 분할을 비밀리에 결정했다. 영국은 이라크 지역을, 프랑스는 시리아 지역을 차지하고 팔레스타인은 국제공동관리구역으로 남겨두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영국은 '벨푸어 선언' - 팔레스티안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기로 공약했다.

좌절된 시리아 독립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아랍의 반란은 메카에 있는 오스만 요새를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오스만 정부의 내각이 무신론자들이며 무슬림들이 단결해 오스만 정부를 무너뜨려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랍인들의 호응은 기대에 못 미쳤다. 아직까지는 아랍 민족주의는 지식인층의 전유물에 불과했고 아랍 대중에겐 오스만 제국의 존재감이 더욱 컸다. 하지만 아랍반란이 지속되면서 대중들은 민족주의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1920년 시리아 의회는 다마스쿠스에서 샤리프 후세인의 셋째 아들 파이잘 이븐 후세인을 시리아의 국왕으로 공식 선언했다.
1920년 4월 산레모 협정을 통해 '사이크스-피코' 협약은 국제적으로 공인됐다. UN은 프랑스의 시리아 위임통치를 결정했다. 파이잘은 1920년 7월 14일 프랑스에게 항복하고 추방돼 영국으로 망명했다.

요르단과 이라크에 세워진 하심 왕국

아랍인들은 시리아와 이라크에서의 위임통치에 반 유럽 감정이 크게 고조됐다. 1921년 4월, 영국은 하심가와 아랍인들을 달래기 위해 트란스요르단 지역에 샤리프 후세인의 둘째 아들 압둘라 이븐 후세인을 국왕으로 하는 왕국을 세웠고 1921년 8월 파이잘을 이라크의 국왕으로 선포했다.

유대인 국가를 세우다. 이스라엘의 건국

19세기 이후 유럽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다. 당대의 유대인들이 보기에 민족주의는 자신들이 꿈꾸는 사회를 이루는 이념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택했다. 사회주의는 1948년 이스라엘을 건국한 주축 세력의 이념이었다.

팔레스타인 이주의 시작

유럽의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들이 자신들만의 민족국가를 만드는 모습을 보며 자신들도 민족국가를 세우고 싶은 열망을 키워갔는데, 이 열망을 최초로 공론화한 인물이 테오도어 헤르츨이다. 헤르츨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조상 대대로 '에레츠 이스라엘(약속의 땅)'이라고 생각해온 팔레스타인에 세워지는 것이 당연했고, 헤르츨은 이러한 생각을 정리해 1896년 <유대인 국가>를 발간했다. 그의 저서는 유럽의 유대인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낳았고 그 이듬해에 시오니즘 운동이 본격화됐다.

커지는 갈등

1917년 발표된 벨푸어 선언에 아랍인들은 분노했다.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통치 아래에 놓이는 것은 물론 거기에 유대인 국가 건설 공약이 더해지자 아랍인들은 조직적인 저항에 나섰다. 게다가 1920년대는 오스만 제국의 몰락과 함께 아랍 민족주의가 끓어오르던 시점이었다. 때마침 몰려드는 유대인 이주민과 아랍인의 대결은 불가피했다.

이스라엘의 건국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에게 '팔레스타인 국가'란 매우 어색한 개념이었다.^248 중동에 그어진 수많은 국경선처럼 팔레스타인 국가는 아랍인들이 어색해하는, 유럽 마음대로 그은 경계였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독립국가보다 시리아에 통합되기를 원했지만 1947년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유엔 총회에서 통과됐다. 하이파에서 3일 동안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1948년 5월 14일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하는 날 아랍국가들의 무장병력은 침공 준비를 마치고 진격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랍 민족주의의 절정, 이집트와 시리아의 국가 통합

나세르의 등장

1940년대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이념을 꼽으라면 단연 아랍 민족주의였다.^274 특히 젋은 군 장교들이 민족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자유장교단'이라는 결사체를 조직해 1952년 쿠데타를 일으켰고 1953년 이집트공화국을 선포했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국가 통합

국가의 재정을 위해 수에즈 운하을 국유화하며 영국과 프랑스의 보복에서 외교적 승리를 거둔 나세르는 '전 아랍세계의 연대'를 호소했다. 연이는 쿠데타로 정세가 혼란하던 시리아에서 가장 유력한 정당이었던 바트당은 나세르에게 국가 통합을 제안했다. 1958년 2월 22일, 아랍연합공화국이 탄생했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합돼 탄생한 새로운 세속적 아랍 민족주의 국가였다. 하지만 아랍연합공화국은 2년 만에 내부에서 무너졌다. 이집트 관료들의 거만함과 나세르의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책에 시리아 군 장교들이 반아랍연합공화국 쿠데타를 일으켰다. 나세르는 시리아의 독립을 인정했다.

아랍 민족주의의 패배, 제 3차 중동전쟁

전쟁의 결과

제 3차 중동전쟁 후 이스라엘의 땅은 네 배나 늘어났지만, 이집트와 아랍국가들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나세르의 패배를 예상하지 못했던 아랍인들은 다시 묻기 시작했다. '아랍 민족주의가 아랍국가들이 처한 위기를 해결해줄 올바른 해답인가?' 아랍인들이 모색한 새로운 해답 중 가장 강력했던 것은 '이슬람주의'[^309]였다.
근대화를 부르짖으며 독재를 정당화하던 세속적 이념이 위기에 몰리자 아랍인들은 '서구적 근대화' 모델을 버리고 자신들의 전통에 뿌리를 둔 종교적 이념을 대안으로 생각해낸 것이다. 이는 근대화를 추구하던 권위주의 정치가 한계에 이르자 '더 나은 근대화'로서 서구적 민주주의를 대안으로 모색했던 대한민국의 경험과는 너무나 다르다.[^310]
[^309]: 이슬람을 국가의 통치 원리로 삼는 정치 이념 [^310]: 310

하산 알 반나, 무슬림형제단을 세우다

아랍 민족주의의 몰락과 이슬람주의의 확산

제 3차 중동전쟁 후, 1960년대 후반 사이트 쿠틉의 사상을 따르는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1970년 나세르가 심장마비로 돌연사한 후 집권한 사다트 대통령은 무슬림형제단에게 사회복지 분야의 고위 공직을 제안했다. 이슬람 세력의 환심을 얻어야만 안정된 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평화조약 체결을 추진하자 이슬람주의 조직은 사다트와 마찰을 빚기 시작하고 탄압받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1981년 이슬람주의 단체의 조직원이 사다트를 암살하면서 이슬람주의 단체들은 강경 탄압대상이 된다.
이슬람주의 세력은 사우디아라비아로 옮겨갔다. 사우드 왕가에게 아랍 민족주의는 공화정을 뜻했기 때문에 왕정의 존속을 위해 이슬람주의자들을 받아들였다. 이집트의 이슬람주의 세력은 사우디아라비아 청년들에게 이슬람주의를 가르쳤고, 이 학생들 중 한 명이 오사마 빈 라덴이다.